[손태규 칼럼-국제정세의 진실] 공산주의자 검사의 기구한 숙명

편집국 / 기사승인 : 2023-09-14 15: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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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지난 7월25일 버클리 대학의 교내 인사가 미국 전역의 관심을 끌었다. “‘체이서 부딘’ 연구소 책임자로 임용.” 그는 좌파 본거지 샌프란시스코 검사장이었다. 공산주의를 실천하는 범죄 정책을 폈다. “가난은 범죄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기소하지 않겠다.”


1년 동안 범죄가 46% 늘었다. 살인 전과자가 다시 범행했으나 그대로 풀려났다. 아시안 노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범죄가 잇따라 일어났다. 결국 그를 뽑아준 이념 동지들이 주도한 주민 소환으로 2년 만에 쫓겨났다. 그런 검사가 1년 만에 유명 대학 자리를 얻었다. 뉴스가 될 법도 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43년 길지 않은 삶. 공산주의에 얽혀 젖을 떼기 전부터 숱한 뉴스에 올랐기 때문에 큰 기사가 되었다.

■ 뼛속까지 스민 공산주의

체이서 부딘은 그냥 검사가 아니다. 미국 공산주의 역사를 상징한다. 삶은 공산주의 그 자체다. 그의 삶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사회에 얼마나 넓고 깊게 뿌리 내렸으며, 얼마나 격렬했는지 읽을 수 있다. 인간의 가치·신념을 형성하는 것은 가정과 학교의 교육, 사회활동 등에서 경험이다. 부딘보다 공산주의 가치와 신념을 체득하기 더 나은 환경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산주의 유전자는 그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공산주의는 모태 이념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서 태어났다. 공산주의자들 손에서 자랐다. 그가 얽힌 공산주의자들은 무장혁명을 선언한 테러리스트들이었다.

부딘의 부모는 유태인으로 공산주의자다. 1969년 미시간 대에서 만들어진 마르크스주의 무장 조직 “웨더 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ound)”의 창립 구성원들이었다. 가수 밥 딜런의 노랫말에서 이름을 딴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쿠바의 체 게바라 게릴라 이론을 따랐다. 20여 년간 폭력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노렸다. 연방 의사당, 펜타곤, 국무부, 캘리포니아 검찰청 등 25개 공공건물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정부 전복을 확신했다. 그런 다음 다른 공산국가처럼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보내 ‘재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한 조직원이 “‘완강한 자본주의자들을 재교육시킬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지도부에 물었더니 ‘다 죽여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것. 그만큼 강경했다.

‘웨더’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검은 표범 당(Black Panther Party)’ 조직원들이 경찰의 습격으로 숨진 것에 대한 반발로 70년 5월 ‘미국 정부에 대한 전쟁선언’을 발표했다. 흑인들의 ‘검은 표범당’은 FBI가 “국내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라 공표한 무장조직.

‘웨더’는 ‘5월19일 공산주의자 조직(May 19th Communists Organization: M19)’과 흑인들의 ‘검은 혁명군(Black Liberation Army)’과 연대해 테러를 했다. 여자들만의 M19는 폭력혁명을 공개 선언한 조직. 5월19일은 월맹의 호치민과 미국의 공산주의자며 무슬림 지도자인 말콤 엑스의 생일이다.

부딘의 어머니 캐시 부딘은 1943년 좌파 집안에서 태어났다. 작은 할아버지는 마르크스 이론가로 예일 대 법대 교수. 아버지는 피델 카스트로 등 쿠바 정부 관계자, 백악관과 법무부 등에서 암약했던 소련 스파이들을 변호했던 마르크스주의 변호사.

돌연변이가 있다. 부딘의 외삼촌은 보수주의 연방판사다. 한 뿌리에서 두 가닥 전혀 다른 생명체로 분리되었다. 남녀 차이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법률 재능을, 딸에겐 공산주의와 정치운동을 물려주었다. 아버지의 동지들은 아들을 아버지에 대한 배신자로 보았다.

캐시는 1970년 뉴욕의 주택 지하에서 군사기지를 공격하기 위한 폭탄 제조 시설을 만들던 중 사고가 났다. 3명이 죽었으나 그녀는 살았다. 10년 이상을 도망자로 살면서도 여러 건의 폭파 사건에 관여했다.

부딘의 아버지 데이비드 길버트는 컬럼비아 대에서 전국 조직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들’이란 좌파 조직 지부를 만들었다. ‘웨더’ 활동 중 토론회에서 “폭력적 3세계 혁명은 세계 공산주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 했다.

두 사람은 지하운동 중 만났다. 아이를 낳았다. 성은 캐시를 따라 부딘. 이름은 흑인 테러리스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체이서’로 지었다. 자신들만의 이념만으론 아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엔 모자란다고 생각했을까? 공산주의자인 조안 체이서마드는 FBI가 지명한 첫 여자 테러리스트. 경찰관 살해 등으로 종신형을 받아 복역 중 1979년 탈옥했다. 쿠바로 도망가 살고 있다. 20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붙어있다. 캐시는 그 살인범의 탈옥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무장 강도를 도왔다.

■ 친부모의 투옥과 공산주의자 양부모

1981년 체이서 일가는 비극의 운명에 빠졌다. 14개월 된 아이를 보모에게 맡기고 부모는 수십 년 이별의 길에 나섰다. 테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M19 공산주의자 조직,’ ‘검은 혁명군’과 함께 현금 수송차량 강도를 벌였다. 160만 달러를 챙겼으나 경찰관 등 3명을 죽였다. 결국 달아나다 잡혔다. 37세 캐이시는 20년, 36세 길버트는 75년 형을 선고받았다.

체이서는 ‘웨더’의 두목, 부두목이었던 빌 에어즈, 버나딘 돈 부부가 입양해 키웠다. 에어즈는 중공의 홍위병을 본떠 조직을 만들었다. “우리는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이다. 부자들은 다 죽여라. 차와 아파트를 부셔라. 집안에 혁명을 일으켜라. 부모를 죽여라. 그것이 진짜 중요하다”고 했다. 돈은 쿠바에서 게릴라 전사 훈련을 받은 혁명 공산주의자. 1970년 대 대부분을 도망자로 살았다. 각종 테러에 가담했기 때문. FBI의 “10명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일리노이 시카고 대 교육학 교수와 노스웨스턴 대 법대 교수가 된 부부는 1960-80년대 가졌던 그들의 목표를 그대로 간직했다. 테러에 어떤 반성과 후회도 없는 완강한 급진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전략을 바꾸었다. 교육개혁, 공동체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가담했다. 1995년 부부는 그들 집에서 주 상원에 출마하는 오바마를 위한 선거자금 모금 파티를 열었다(오바마가 공산주의자로 분석되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두 사람과의 절친 관계다).

그런 양부모 교육 속에서, 친부모를 면회 다니면서 체이서는 공산주의를 체득했다. 에어즈는 어린 체이서에게 “너의 부모는 강도가 아니라 의적 로빈 후드였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예일 대를 나온 뒤 ‘로즈 장학생’에 뽑혀 영국 옥스퍼드 대 대학원에 유학했다. 로즈 장학생은 세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장학금으로 꼽힌다. 석사를 마친 뒤 베네수엘라로가 공산주의자 휴고 차베스 대통령의 보좌관이 되었다. 베네수엘라 혁명에 관한 책을 썼다. 그런 다음 예일 대 법대에 진학했다. 최고의 학력이다.

그가 차베스에게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양 아버지 에어즈는 베네수엘라에 여러 차례 갔었다. 차베스가 실천하는 공산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 공산주의 신념은 바뀌지 않는다

부딘은 로즈 장학생 신청서에 “어릴 때 나는 부모의 투옥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나는 볼리비아의 도시 참상, 칠레의 노숙자, 과테말라의 문맹자 등 세계의 감옥을 본다”고 적었다. 부모를 투옥시킨 세상에 대한 복수는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라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의 부모는 미국 제국주의와의 전쟁에 모든 것을 바쳤다. 나 역시 같은 일에 바치고 있다”고도 적었다. 누구도 부모 4명의 이념을 그대로 품은 이 젊은이에게 공산주의가 수많은 사람들을 압제했다는 것을 얘기 해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체이서는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으로 돌아 와 국선변호인 등으로 활약했다. 2019년 마르크스주의자며 억만장자인 조지 소로스 지원으로 검사장에 선출됐다. 소로스는 ‘사법개혁’이란 명분을 걸고 검사 선거에 1억 달러 이상 지원해 왔다. 체이서는 62만 달러를 받았다. 75명의 ‘소로스 검사들’이 태어났다. 이들은 사법체계를 인종차별 도구로 보는 마르크스 법이념을 따른다. 1천 달러 이하의 도둑질은 처벌하지 않는다. 가게털이, 마약밀매, 흉악범죄에 대한 기소를 거부한다. 대도시가 ‘범죄도시’가 되는 이유다.

부딘은 주민소환 움직임에도 정책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범죄 봐주기로 공산주의를 실현하려든 꿈은 주민소환으로 깨져버렸다. 샌프란시스코의 이념 동지들이 등을 돌렸다. 정작 위험이 닥치자 이념보다는 자신들의 안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23년을 복역한 체이서의 어머니는 2003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41년을 형무소에서 지낸 길버트는 2021년 보석으로 석방됐다. 케이시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 컬럼비아 대 교수로 있다 2022년 죽었다. 아들과 길버트가 마지막을 지켰다.

케이시는 지하 활동 시절을 회상하면서 “문제가 많았고 잘못됐다”고 했다. 그러나 확고한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체이서는 “어머니가 배운 교훈은 투쟁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지 않아야 했다가 아니었다. 비극적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얻은 교훈은 ’폭력은 결실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목표는 정당했으나 방법에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1877년 사회주의자 노동당이, 1917년 공산당이 만들어졌다. 좌파 역사는 길다. 뿌리는 깊고 넓다. 그러나 체이서 가족만큼 공산주의에 격렬하게 온몸을 바친 가족은 드물다. 체이서 일가에게 이념은 삶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삶의 전부였다. 그들은 오로지 공산주의를 위해서만 살았다. 체이서는 공산주의란 숙명 속에서 스스로 공산주의자 운명을 개척했다.

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에서 시작한 사회 진화의 마지막 단계는 공산주의라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련의 붕괴, 중공의 참상, 캄보디아 대학살 등을 목격하고도 공산주의 세계를 만들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과거보다 덜 과격하나 더 정교하고 철저하게 세계 속을 파고든다. 좌파의 혁명 전략은 현재진행형. 누구나 부러워 할 엘리트 길을 밟은 체이서 부딘의 43년 인생이 증명한다.

[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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