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에서 활동 중인 네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
![]() |
/번역가 조민영 |
어색함을 감추려고 얼른 책을 꺼내고 노트북을 켠다. 창을 마주한 자리에 앉으니 갑자기 쌀쌀해진 가을 풍경이 완연하다. 신기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건널목에 선 사람도 약속이나 한 듯 옷 색깔이 짙은 남색이다.
금세 카페 안 공기와 분위기 속으로 스며든다. 적당한 백색소음을 뒤로 하고 책 속으로 몰입하려는 찰나, 반바지 차림 남자가 내 옆 빈자리에 앉는다. 좌석 아래 콘센트를 찾느라 몸을 숙이다 노트북 거치대를 떨어뜨린다. 부산스러움에 집중력이 흩어진다. 남자가 안정을 찾길 기다리며, 앞쪽 창가 자리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운동복 차림으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모습이 세상 느긋하고 여유롭다.
이야깃거리도 안 될 이런 일상을 적어놓고 보니, 진짜 이야깃거리가 된 듯하다. 내 일상이 아닌 남의 일상으로 채워진 글. 아니 에르노가 쓴 〈바깥 일기〉다. 이 책은 1985~1992년에 써 내려간 일기를, 8년 뒤 출간한 또 다른 일기 〈밖의 삶〉에는 1993~1999년에 쓴 글을 담았다.
작가는 말한다. “내면 일기를 쓰면서 자아를 성찰하기보다는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더욱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확신이 선다.” 문학 형식으로서 ‘일기’는 200년 전에 탄생했다는데, 내면 일기라는 전통과 상식을 깬 방향전환이 과감하다.
〈바깥 일기〉에서 시선은 작가가 집 밖을 나서서 마주하는 사람, 대화, 사물, 풍경에 가닿는다. 여기서 작가는 장면 속 당사자가 아니라, 스냅 사진을 찍는 관찰자고 기록자다.
에르노는 과거와 역사가 켜켜이 쌓인 지방 여러 도시를 떠다니다 파리 인근 신도시로 이주했다. 20년 차 도시인이 된 작가는 이제 단골 마트에서, 파리를 오가는 고속철도에서, 정형외과 탈의실에서 시대 현실을 포착한다.
열차 안에서 마치 제집처럼 손톱을 깎는 청년, 역 주변에서 구걸하는 맹인과 걸인, 계산 오류로 손님과 매니저에게 타박을 듣는 마트 계산원, 누군가 어두운 구석에 끼적인 외설적인 그라피티, 주택단지 주변이면 어김없이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 심지어 전철역 통로에서 은밀한 부위를 드러내며 서 있는 바바리맨까지. 에르노는 분명히 거기에 있지만 아무도 애써 인식하지 않는 보통의 순간을 스케치한다.
이런 단편적인 장면, 열차나 거리에서 엿듣는 파편화된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에르노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 표현하는 동작, 태도, 말을 기록하면서 그와 가까워지는 환상을 품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남기는 감정은 실재하는 그 무엇이다. 어쩌면 나는 그들을 통해, 그들의 행동 방식과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나에 대한 무언가를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을 찍듯 객관적인 글쓰기를 계획한 에르노의 의도는 애초에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사진작가가 은밀히 작동하는 자신의 취향과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에르노가 저며낸 현실 단면에는 개인 취향과 의식이 담길 수밖에 없다. 작가는 각 스케치 말미에 참견과 판단을 최대한 자제하며 짧은 코멘트를 덧붙인다. 객관적 글쓰기는 불가능했을지 몰라도 그 속에서 독자는 유머와 통찰 넘치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아니 에르노는 30여 년 전 이 글을 썼다. 하지만 바깥으로부터 나를 바라보며 교감하는 이 방식은 어쩌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분노를 폭발하는 지금 우리에게 더 유효하지 않을까. 언젠가 지하철에서 나와 내가 읽던 책 쑤퉁의 〈이혼 지침서〉를 쳐다보던 남자. 제목을 기억하려 애쓰는 그 얼굴에 스친 절박함과 안도감, 우리가 나눈 공모의 눈빛. 어떤 사정인지는 영원히 불투명하게 수수께끼로 남겠지만, 그 순간적 교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
번역가 조민영 |
[저작권자ⓒ 뉴스밸런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