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스트리트북스] 불굴의 의지로 써 내려간 3000쪽 일기

북에디터 유소영 / 기사승인 : 2023-08-23 09: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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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저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번역: 한미선 |도솔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에서 활동 중인 네 명의 북에디터가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북에디터 유소영

[북에디터 유소영] 유명한 책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러시아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올리버 색스는 “인간이 어떤 부분을 상실한 상태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새롭게 적응해 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그 모든 것이 루리야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는 책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를 썼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폭탄 파편을 맞아 좌측 후두부가 크게 손상된 환자 자세츠키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환자는 뇌 손상으로 삶이 송두리째 변했다. 

 

그는 전문학교 4학년생이었지만 부상 이후론 기억을 모두 잃고 글조차 쓰고 읽을 줄 모르게 되었다. 자세츠키는 이 사실을 병실을 나설 수 있게 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화장실 명패에 쓰인 '남자 화장실'이란 글자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무지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세계는 작은 조각들로 분해되었다. 자세츠키는 일기에 ‘작은 잉크병 하나도 완벽한 형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썼다. 신체 각 부분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배변하고 싶을 때 그는 항문이 어디 있는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루리야는 자세츠키를 1943년 5월 말에 처음 만났다. 그가 부상당한 지 석 달쯤 되는 무렵이었다. 이름과 고향이 어딘지 써보라는 주문에 자세츠키는 우스꽝스럽게 연필을 집어 든 다음 손으로 더듬어서 종이를 찾았지만 결국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츠키는 무능력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거부했다. 그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는 읽는 법을 다시 배웠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쓰는 것은 어땠을까? 처음에 쓰기는 읽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연필 쥐는 법은 물론 글자 쓰는 법도 잊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 글자를 떠올려야 할 때마다 알파벳을 처음부터 암송해야 했다. 

 

그러나 어떤 의사가 종이에서 손을 떼지 말고 무의식적으로 글씨를 써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쓴 글을 읽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머리 부상 때문에 경험하게 된 끔찍한 혼돈 세계와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쏟아부은 자신의 노력을 상세히 기록하는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낱말을 찾으면서 매일 일기를 썼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이 힘든 작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 결론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다’였다. 반면에 과거 단편적인 기억을 조합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드는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 삶을 쓰는 일기는 그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아무것도 기억하거나 쓸 수 없을 때가 더 많았던 그는 이렇게 25년간 글 3000여 쪽을 썼다. 그는 일기에 ‘끝나지 않은 나의 싸움’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책은 루리야가 자세츠키를 26년간 주기적으로 만나 그의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한 기록이자 자세츠키가 25년간 써 내려간 일기다. 자세츠키와 루리야가 쓴 글이 번갈아 등장하며 화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올리버 색스는 이 책 서문을 쓰면서 ‘자세츠키의 절망과 실망감의 옆에는 언제나 자기 삶에 의미를 되살리려고 하는, 포기할 줄 모르는 강력한 의지가 버티고 있다’고 적었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루리야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있다. 시각적인 이미지로 모든 것을 한없이 기억하는 천재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 주인공은 말년에 자신이 5분 전에 들은 이야기와 5년 전에 들은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상태가 악화되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책이다. 아쉽게도 서점에서는 품절로 뜬다. 

 

  /북에디터 유소영


| 북에디터 유소영. 책 만드는 데 시간을 쏟느라 정작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한 것이 슬픈 출판 기획편집자. 요즘은 눈을 감고도 읽을 수 있는 오디오북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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