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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영 |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다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
[번역가 조민영] 시작은 매즈 미켈슨이 나오는 미국 드라마 <한니발>이었다. 몇 년 전 야심한 시각에 어쩌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됐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잔혹함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며 몰입했던 기억은 또렷하다.
이 드라마 원작은 <양들의 침묵>으로 잘 알려진 토머스 해리스의 ‘한니발 렉터’ 시리즈다. 영화가 나온 지 30년이 넘었지만, 조디 포스터 입 부분에 해골박각시나방이 앉아 있는 포스터나 안소니 홉킨스가 썼던 기괴한 마스크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렉터 시리즈는 책 출간 순으로 <레드 드래곤>(1981), <양들의 침묵>(1988), <한니발>(1999), <한니발 라이징>(2006) 모두 4편이다. <양들의 침묵>이 1991년 가장 먼저 영화화되어 아카데미상 5개 부문을 휩쓸었고, 그 유명세에 힘입어 나머지 3편도 전부 영화로 제작됐다.
이후 시리즈 전체를 유기적으로 엮고 감각적 영상미로 무장한 드라마 <한니발>(NBC)이 다시 한번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최근에는 <양들의 침묵> 1년 뒤를 다룬 드라마 <클라리스>(CBS)가 공개돼, 스릴러물 고전으로서 이 시리즈의 생명력을 새삼 실감했다.
<양들의 침묵>은 FBI 연수생 클라리스 M. 스탈링이 식인 살인마이자 정신과 의사인 한니발 렉터의 도움을 받아,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을 검거하는 과정을 그린 범죄 소설이다.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인물은 렉터지만, 이 작품은 스탈링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비로소 정식 FBI 수사관으로 거듭나는 일종의 성장 소설로 읽을 수 있다.
다만 성장을 돕는 조력자가 스탈링을 발탁한 FBI 상관 잭 크로포드가 아니라, ‘순수한 소시오패스’이자 ‘괴물 식인종’ 렉터 박사란 점이 소름 돋는다. 인간의 깊숙한 내면을 꿰뚫는 정신과 의사 렉터는 버팔로 빌 사건 단서를 빌미로 스탈링의 내면을 파고든다.
스탈링은 최면에 걸린 듯, 도살장에서 울부짖는 어린 양들을 구하지 못한 어릴 적 기억을 그에게 털어놓는다. 렉터는 트라우마였던 양들의 울음소리가 사실은 스탈링을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일깨워준다. 그는 스탈링이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양들은 한동안 침묵하겠지만 그 울음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라는 편지를 남긴 채 유유히 세상 밖으로 사라진다.
책을 덮고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렉터는 어쩌다 유능한 정신과 의사에서 인육을 먹는 괴물이 됐을까. 모든 수사관을 비웃으며 농락하던 그가, 왜 이 풋내기 연수생에게만은 연민을 보이며 아버지이자 오빠이자 연인 역할을 하려 했을까.
그 답은 시리즈의 프리퀄인 <한니발 라이징>에 있다. 시리즈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작품은 한니발 렉터라는 그로테스크한 캐릭터의 시작이자, 자신이 탄생시킨 괴물을 위한 작가의 애정 어린 변론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3살이던 렉터는 전쟁의 광기 속에 어린 여동생 미샤를 잃는다. 굶주림에 지쳐 이성을 상실한 인간들은 급기야 어린 아이들로 허기를 채우는 짐승으로 전락한다. 이 끔찍한 상흔은 어린 렉터 마음에 죄책감과 증오로 뿌리내리고, 결국 미샤를 앗아간 자들을 찾아내 죽이고 먹음으로써 괴물 한니발 렉터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런 그가 아직 순수하고 투명한 스탈링을 보며 미샤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소시오패스 렉터가 스탈링에게 보인 연민은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을 듯하다. 이 연민은 불편하고 혐오스럽지만,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는 스탈링 주변 남성들에 비하면 인간답기까지 하다.
<양들의 침묵>은 이후에 나온 그 어떤 스릴러물과 견주어도 빛을 잃지 않는 걸작이다. 더불어 시리즈 전체가 책과 영화로 나와 있어 두 버전을 비교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안타깝게도 <레드 드래곤>만은 국내에서 2012년 이후 지금까지 절판 상태로, 중고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위대한 레드 드래곤과 태양을 입은 여인’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이 하루빨리 서가에 나란히 꽂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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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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