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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튤립> /극단 돌파구 |
[칼럼니스트 강미유] 극단 돌파구의 신작 〈튤립〉이 ‘제18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3월 1일부터 8일까지 선보인다.
동아연극상 수상자 김도영 작가와 전인철 연출가가 함께 만든 이 작품은 1920년대 말 도쿄를 배경으로, 일제강점기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개인의 비극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작품 출발점이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1904년 러일전쟁. 연해주 끝자락 연추, 흐드러지게 핀 튤립밭. 전쟁은 한 남자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20여 년이 흐른 뒤, 그는 쿠로(권정훈)라는 이름으로 도쿄에 살고 있다. 학교 담장 옆 작은 튤립 정원을 가꾸며 한 청년을 멀리서 바라본다. 이 청년 쥬리프(김하람)는 일본인 야마토(김정호)와 에리코(황순미) 부부에게 입양돼 자랐고, 이름 자체가 튤립의 일본식 발음이다.
조선인 쿠로가 강탈당한 아들이 튤립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상류층의 저택에서 자라고 있다는 설정 자체가, 이 작품이 말하려는 식민주의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김도영 작가는 “집필 과정에서 스스로 던진 질문이 작품의 방향을 바꿨다”며 “애초에 등장인물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는데 절반쯤 썼을 무렵, 때마침 흑백요리사 시즌1에서 여러 가지 정찬과 단 하나의 요리가 대결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애초 튤립 한 다발이 아니라 딱 한 송이가 됐고, 지금처럼 5명이 무대에 서는 심플한 모습이 됐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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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튤립> /극단 돌파구 |
이 선택은 탁월했다. 〈튤립〉은 식민주의를 다루는 기존 서사들이 투쟁과 저항, 이분법적 선악 구도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한 공간 안에서 기형적인 일상을 영위하며 겪는 심리적 파탄에 주목한다.
식민의 역사를 거대 담론이 아닌 한 가족의 균열로 읽어내고 있는 것. 옮겨 심은 구근이 어떤 꽃으로 피어나는지를 묻는 이 연극은, 역사가 개인의 영혼에 남기는 상처를 차분히 증언한다.
쿠로는 복수를 위해 도쿄까지 왔지만 복수를 완성하지 않는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 침묵과 죽음을 선택한다. 가해자 야마토는 제국의 질서를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그 균열을 감지하는 인물이며, 가정을 지키려다 폭력을 택하는 에리코,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가정부 미호(윤경)까지, 이 작품의 인물들은 어느 하나 단순하게 재단되지 않는다.
전인철 연출은 이 복잡한 내면의 드라마를 무대 언어로 구현하는 데 있어 비움의 미학을 택했다. 구체적인 장소성을 제거하고, 배우의 신체와 빛이 공간의 부피감을 채우도록 설계된 무대는 관객이 인물의 고통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특히 배우들이 퇴장하지 않고 무대 위에 머물며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연출은 시간과 기억이 한 공간 안에 중첩되는 효과를 낸다.
전인철 연출가는 “김도영 작가의 시나리오가 잘 전달되고 배우가 잘 보이도록 무대 상부도 막았다”며 “배우가 퇴장하지 않으면, 처음엔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아도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무대 위에 쌓이게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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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영 작가(가운데)와 전인철 연출(오른쪽) |
이렇게 구상된 무대는 디자이너 박상봉이 연출한 조명으로 한층 빛을 발한다. 조명이 무대 바닥에 묵직하게 고이거나 벽면에 번지며 공간의 질감을 실시간으로 바꾼다.
배우들의 의상도 시각적으로 권력의 위계를 각인시키는 데 집중했다. 디자이너 김지연은 1920년대 도쿄의 시대적 실루엣을 기반으로, 야마토의 하양 양복에 붉은 넥타이와 에리코의 화려한 기모노를 쿠로의 바래고 검어진 색감과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극의 말미,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쥬리프는 도쿄를 떠나 히로시마의 증권거래소로 향한다. 관객은 1945년 원폭 투하의 역사를 알고 있다. 쥬리프는 원폭의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김도영 작가는 “히로시마는 그 단어만 들어도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다”며 “이 전쟁은 끝날 것이고, 그의 친부모처럼 쥬리프는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공연에는 실제 부자 관계인 김정호(야마토)와 김하람(쥬리프), 실제 부부인 권정훈(쿠로)과 황순미(에리코)가 출연해 혈연과 폭력, 강탈과 보호라는 이 작품의 핵심 주제를 무대 안팎으로 깊게 공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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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튤립> /극단 돌파구 |
|삶은 다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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