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스트리트북스]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단순함의 철학

북에디터 한성수 / 기사승인 : 2026-05-06 08:15:13
  • -
  • +
  • 인쇄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저자: 로버트 풀검 |역자: 최정인 |알에이치코리아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북에디터 한성수]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1990년대 중반이었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해 세상의 속도와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제목부터가 낯설었다. 유치원이라니. 그곳에서 뭘 배웠다고, 그게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일 수 있을까. 반은 의심, 반은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감정은 지금도 또렷하다.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벅참. 특별할 것이라곤 없는 단순한 말들이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뒤 이 책을 다시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에 다시 만난 건 아니었다. 2018년, 출간 30주년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고 반가운 마음에 사두었다. 그대로 몇 년을 묵혀뒀다. 그러다 최근에야 책장 한쪽에 꽂혀 있던 걸 다시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읽힐까’하는 기대는 없었다. 오히려 꽤 좋은 감정으로 읽었던 기억을 훼손하진 않을지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몇 장 넘기지 않아 기분이 이상했다. 꽤 오래 전이긴 해도 푹 빠져서 읽었던 게 분명한데,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기억이 희미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읽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겠다. 

 

특히 한 일화는 몇 번을 앞으로 거슬러 다시 봤다. 저자 로버트 풀검이 대학원 시절 겪은 이야기다. 생활비와 학비가 없어 학장에게 도움을 청했고, 학장은 필요한 예산을 짜오라고 했다. 그러나 몇 번을 고쳐 제출해도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더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였다고 생각했을 때, 결국 불만을 터뜨리며 이유를 묻는다. 그때 학장이 건넨 말이 이렇다.

 

“자네 예산에는 즐거움을 위한 항목이 하나도 없네. 책, 꽃, 음악, 심지어 시원한 맥주 한 잔 할 돈조차 없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돈이 한 푼도 들어 있지 않아. 우리는 자네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돕지 않네.”(62쪽)

 

예전에 비유처럼 받아들였던 말들이, 이번에는 일상으로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버티기 위한 삶’의 예산만 짠다. 꼭 필요한 것들, 줄일 수 없는 것들, 당장 견디기 위해 필요한 항목들로만 채운다. 그 안에 즐거움이나 여유, 혹은 타인을 위한 몫은 쉽게 빠진다. 빠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빠져야 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렇게 짜인 삶은 오래 가지 못한다. 견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삶을 유지할 수는 없다. 

 

이 책이 말하는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은 결국 그 지점으로 돌아온다. 버티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 나누기, 배려하기, 기뻐하기, 함께하기.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뒤로 밀어두었던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기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것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든다. 더 잘 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오래 잘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에 대해 묻는다.

 

60여 편의 짧은 일화로 이루어져 있지만, 읽는 동안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아 며칠에 걸쳐 읽었다. 몇 장 넘기다 어느 지점에서 꼭 몇 번은 멈추게 된다. 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 후기 등을 찾아보니 묘하게 사람마다 꽂히는 지점이 다른 듯하다. 어떤 이는 ‘함께 나누는 삶’에서 멈추고, 어떤 이는 ‘정직함’에서, 또 다른 이는 ‘질서와 배려’에서 멈춘다.

 

그런데도 공통점은 있다. 자기 삶으로 가져가게 되는 문장 하나쯤은 반드시 생겼다.

 

이 책이 오랫동안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다.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관계, 선택, 책임, 두려움. 복잡해 보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단순한 문제다. 다만 그 단순함을 지키는 일이 어려울 뿐.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이 배우려 하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붙잡는 일.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정도의 단순함일지도 모른다.

 

 

|한성수. 내가 왜 이 일을 택했나 반평생 후회 속에 살았지만, 그래도 어느 동네서점이라도 발견하면 홀린 듯 들어가 종이 냄새 맡으며 좋다고 웃는 책쟁이. 

[저작권자ⓒ 뉴스밸런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