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스트리트북스] 기록은 왜 자꾸 실패하는가

북에디터 한성수 / 기사승인 : 2026-03-25 01: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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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라는 세계 | 저자 : 리니 | 더퀘스트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북에디터 한성수] 연말이 되면 늘 다이어리를 산다. 제대로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나를 좀 더 잘 살게 해줄 것 같은 기대를 품고 고른다. 

 

하지만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다이어리는 금세 정직해진다. 뒤로 갈수록 빼곡히 채워진 날보다 건너뛴 날이 많아진다. 겨우 적혀 있는 것도 미팅 시간과 장소뿐이다. 기록이라기보다 일정 관리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기록을 꾸준히 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다. 기록이 쌓일수록 내가 해내지 못한 일들이 더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사회생활 초기에 만났던 선배들 다이어리는 대개 빼곡했고, 그 자체로 일종의 능력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따라 해보려고 애썼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아침에는 해야 할 일을 적고, 밤에는 해내지 못한 일을 확인하는 방식은 기록이라기보다 점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점검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그 무렵부터 부록은 부담이 됐다. 남기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를 평가하는 일이 되었으니 부담일 밖에. 

 

<기록이라는 세계>의 저자 리나는 나 같은 사람을 꽤 많이 만나본 듯하다. 기록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 기록을 하면서도 점점 지쳐 의미 없이 적는 사람, 결국 기록을 포기해버린 사람.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기록을 잘하는 방법 대신 기록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을 소개한다. 

 

책에 등장하는 기록의 여러 방식 중 인상적인 건 ‘연력 쓰기’다. 신문지 한 장 크기의 달력에 하루를 한 줄로 적어 내려가는 방식. 저자 역시 처음에는 좌절을 경험한다. 기대했던 만큼 하루를 채우지 못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 다시 들여다본 기록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기 시작한다. 기대에 못 미친 하루들이었지만 그 하루마다 ‘무언가 하나’는 분명히 남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를 베어버릴 풀처럼 생각하면 삶이 고달프지만, 가만히 두고 모아보면 나의 삶에 피어나는 꽃이 되더라고요.” (30쪽)

 

이 대목에서 기록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 의문이 들었다. 기록을 하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니라,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온 하루가 문제였던 게 아닐까.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를 굳이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기록은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그와 함께 이 책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건 기록 이전의 태도, 즉 ‘관찰’이다. 

 

저자는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관찰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감정이 앞선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기록이 쌓이면서 상대의 행동과 맥락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이쯤 되면 기록은 전혀 다른 기능을 갖는다.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남길 만한 하루를 기다리는 사람과 남길 것을 발견하며 하루를 보내는 사람의 차이. 이 책은 그 간극을 조용히 보여준다. 

 

다이어리를 다시 펼친다고 해서 갑자기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적어야 할 것을 찾기보다 보아야 할 것을 찾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연력을 쓸지, 관찰일지를 쓸지, 다이어리를 끄적일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을 적든 이 정도의 변화라면 다시 시도해볼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가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남기기 위해서. 

 

 

|한성수. 내가 왜 이 일을 택했나 반평생 후회 속에 살았지만, 그래도 어느 동네서점이라도 발견하면 홀린 듯 들어가 종이 냄새 맡으며 좋다고 웃는 책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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