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스트리트북스]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번역가 조민영 / 기사승인 : 2023-09-27 00: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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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지 않기 위하여-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저자: 유제프 차프스키 |역자: 류재 |밤의책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에서 활동 중인 네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번역가 조민영
[번역가 조민영] 2019년 방영 드라마 〈왓쳐〉에는 범인이 피해자를 결박해놓고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다움은 어디서 올까요?”

 

비인간적인 선택을 하게 해놓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인간다움을 운운하다니… 그 잔인함에 드라마 속 피해자도 내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이른바 정의로운 검사였던 피해자는 그 일을 겪은 뒤 돈만 밝히는 여변호사가 된다. 이후 자신의 인간다움을 파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다시 끔찍한 기억을 마주한다.

 

그(피해자)에게 인간다움이란 자존감이나 어떤 신념이었을까?

 

범인은 인간다움을 해치는 상징적 행위로 피해자 ‘엄지’를 자른다. 사실 엄지가 없었다면 ‘손을 쓰는 사람’인 호모하빌리스는 진화의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또 다른 희생자는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을 연민하는 동물”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도 타인도 연민할 줄 모르는 괴물로 변한다. 이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인간다움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이란 울림 없는 답을 내놓는다.

 

각자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은 아마 삶의 숫자만큼이나 다르겠다. 나는, 그리 열심히 구하진 않았으나 무의식 속에 자리하던 이 질문의 답을 우연치 않게 찾았다. 바로 폴란드 화가이자 작가인 유제프 차프스키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에서였다.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인간다움’의 산물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이어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은 폴란드 지식인을 소련 포로수용소에 대거 가둔다. 소련의 이 만행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폴란드인의 ‘인간다움’을 말살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차프스키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료가 한꺼번에 수백 명씩 사라진다. 그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불러낸다.

 

영하 45℃까지 떨어지는 소련의 그랴조베츠 수용소에서 100명도 채 안 되는 생존자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이들을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렇게 지식인이 각자 자기 분야의 지식을 온기처럼 서로 나눈다. 누구는 책의 역사를, 누구는 영국 역사와 여러 민족의 이주 역사를 강의했다. 차프스키는 프랑스와 폴란드 회화와 프랑스 문학을 담당한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유명세에 비해 실제 작품을 읽은 사람은 별로 없을 고전 중의 고전이다.

 

한 문장이 한 페이지를 넘어가고 장 구분도 거의 없으며 내용도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작품이니 말이다. 참담하게도 나는 이 대하소설을 몇 년째 1권만 읽고 있다. 그 와중에 차프스키는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서만 강의했으니 정말 초인적인 기억력이다.

 

왜 하필 프루스트였을까. 프루스트의 그 작고 미세한 인상이 차프스키와 동료를 차디찬 그랴조베츠 수용소에서 따스한 ‘스완네 집 쪽으로’ ‘게르망트 쪽’으로 데려가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차프스키는 이렇게 술회했다. “프루스트와 들라크루아에 대한 추억으로 버텨낸 그 시간들만큼은 지금까지도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로 남아 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서 ‘인간다움’이 어디서 오는지 그 답을 찾았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지, 바로 존엄을 지켜내려는 고귀한 마음이 아닐까.

 

  /번역가 조민영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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